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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사진미술관 개관 기획전
오래된 풍경 - 능, 삼국유사, 경주남산
2011년 4월 16일 - 2011년 7월 3일


ⓒ 강운구, <능> 노동동 고분군, 1984


오래된 풍경

강운구

이제 사진은 전문적인 것을 찍는 일 조차 사진하는 사람들의 것만은 아니다. 시인도, 화가도, 건축가도 제가끔 다 잘 찍는다. 디지털로 되면서 사진술은, 그야말로 민주화되었다. 그러므로 사진의 내용은, 사진가들의 사진은 더 심화될 것이다. 지금 그런가? 오래된 보따리를 풀면서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든다. 본디는 ‘역사 삼부작’이 이 사진들을 아우르는 이름이었다. 「마을 삼부작」 전람회를 한 지 꼭 십 년 만에 우연하게도 (비록 제목은 바꿨지만) ‘삼부작’전을 하게 되었다. 바꾼 제목인 ‘오래된 풍경’은 ‘역사 삼부작’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로부터 그리 동떨어지지는 않으면서 거창한 느낌을 걷어낸 번안이다. 이 제목은, 역사의 풍경이니까 오래된 것이며, 또한 찍은 지 오래되었으므로 그렇다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사진들은 머나먼 옛날에 역사의 흐름 속으로 잠겨 버린, 이 땅의 사람들이 남긴, 이 땅의 지문을 찾아 헤맨 결과이다.


내용

‘능陵’은 신라 때 왕의 무덤들을 말한다. 천 년 세월 넘게 버티고 있는 그 거대한 무덤 속의 임금이 누구인지는, 아는 것도 있고 그저 짐작만 하는 것들도 있으며, 거개가 도굴되었거나 발굴된 것들이다. 능들은 산자락 가까이나 얕은 산(표고 백 미터쯤)에 있기도 하나, 대부분은 평지에 있다. 산에 가까이 있거나 산속에 있는 것들은 상대적으로 작고, 평지에 만든 봉분들은 거대하다. 그 거대한 봉분들은 산 같으며, 그 너머로 멀리 보이는 진짜 산 능선들과 잘 어울린다. 산 위에 이런 거대한 봉분을 만들었다면 아마 산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산처럼 보이게 하려고 평지에 봉분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 점이 내가 능들을 관찰하는 요점이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는 말처럼, 능들은 핑계보다 더한 역사적, 현실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다. 안타깝지만, 그 긴 사연들을 사진으로는 다 전달(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다행히 사진은 현재의 모양이나 상태를 통해서 그런 암시나 시사를 할 수는 있다.
몇 장은 이번에 처음으로 발표하는 것이고, 거의 다는, 작가 강석경姜石景씨가 글을 쓰고 창작과비평사에서 2000년에 발간한 『능으로 가는 길』에 수록된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널리 알려진 그 중요한 책을 여기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다만 짧게, 경험과 은밀한 재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역사를 기록한 것이지만, 넓게 보자면 신화를 기술한 것이다. 이 책은 칠백삼십 년 전쯤인 고려 충렬왕忠烈王 7년(1281)에 간행되었다. 일연一然(1206-1289) 스님이 칠십대 중반에, 그때까지 수집했던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단군신화 에서부터 통일신라가 멸망할 때까지(기원전 57-기원후 936)의 여러 사실을 정리하고 편집해서 쓴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유사』는 일연 스님이 쓸 당시로부터 몇백 년에서 몇천 년 전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나는 그 장대한 역사에서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서사-신화와 문학에 빠져서 읽고 또 읽으며 상상해 보기를 좋아했다. 그러다 이 번역본 저 번역본(물론 그 책은 한문으로 씌어져 있으므로)을 대조해 가면서도 읽었다. 한문이 그리도 어려운 것인지, 같은 문장이 미묘하게 다른 게 아니라 아주 다르게 되어있는 번역들도 읽으며 이상한 재미를 누렸다.
이 책의 각 장은 거개가 신화를 말하고 있었으나, 그게 언제 어디였다고 꼭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죽령 동쪽 백 리쯤 되는 곳에 우뚝하게 높은 산이 있다. 진평왕眞平王 9년 정미丁未(587년)에, 사면이 한 길씩이요 사방에는 석가여래를 조각하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씌운 돌 하나가 돌연히 하늘로부터 그 산 꼭대기에 떨어졌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달려가서 돌에 예배하고 옆에 절을 세우고는 이름을 대승사라고 하였다. …(그) 산 이름은 역덕산 또는 사불산이라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는 것처럼 신화와 사실이 섞여서 기록되어 있다. 문득 그런 장소의 뜻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단단히 각오하고 그것을 찾는 탐험을 떠났다. 그런데 탐험이란 말이 쑥스럽게도, 그 옆에 세웠다는 대승사大乘寺―공덕산功德山(해발 구백십이 미터) 자락에 있다. 그 절이 있다는 ‘역덕산亦德山’ 또는 ‘사불산四佛山’은 지도에 없다―를 찾아가는 길에 윤필암閏筆庵에 들렀다가 거기서 멀리 쳐다보이는 가파른 한 봉우리에 있는 매우 심상찮아 보이는 바위가 눈에 띄었다. 물어보고 할 겨를도 없이 헉헉대며 올라갔더니, 어! 그게 거기서 눈앞에 나타났다. 땀에 젖어 있는 온몸과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그때 거기서 기록과 신화의 의미를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그곳은 죽령竹嶺 동쪽이 아니라 서남쪽이었고, 조령鳥嶺 동쪽이었다. 공덕산에서 양쪽 영嶺까지를, 지도상에서 지금의 길을 따라 측정해 보니 죽령까지는 사십이 킬로미터쯤이고 조령까지는 사십육 킬로미터쯤이었다. 그러니 그곳은 조령과 죽령 사이의 중간 지점이며, 어느 쪽이건 일연 스님이 기록한 것처럼 다 백 리 남짓이다. “…돌연히 하늘로부터 그 산 꼭대기에 떨어진” 사건이 있은 지 거의 칠백 년 뒤에 일연 스님이 기록한 것이므로, 아마 그 긴 세월 동안 이야기가 전해 오면서 어디선가 방향이 와전되었거나 아니면 영 이름이 그리 되었을 것이다. 이런 비밀스러운 오류(?)까지 알게 되니 재미가 더 났다. 그 뒤부터 몇 년간 짬짬이 틈을 내어, 항목과 지명을 빽빽하게 적은 수첩을 들고 온 나라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이 땅에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 그 오래된 풍경을 찾았을 때마다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신화란 하늘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 땅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까치글방에서 1999년에 출판한, 리상호 번역에 내가 찍은 사진을 덧붙인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에 많은 사진이 실려 있다. 전시회에서는 중간 중간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사정이 없는 한 책의 순서대로 전시했다. 책에서는 사진마다 그곳으로 찾아가는 길을 설명했다.

‘경주 남산’이 ‘오래된 풍경’ 중에서는 가장 먼저 한 작업이다. 그땐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를 시작할 즈음이었다. 말이야 듣기 좋은 프리랜서이지, 사실은 한심한 실업자나 다르지 않았다. 언제 부탁이 들어올지도 모르는 일감을 기다리느니, 오래 전부터 궁리하던 일을 하나하나 해 나갈 작정을 했다. 한 열흘쯤, 흙먼지 날리는 버스를 갈아타고 다니며 온 나라 산천과 눈 맞추고 착잡한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경주에 내려서 남산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몇 군데를 가 보니 스물 몇 해 전에 처음 보았던 때와 상태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저물어 어둑해질 때까지 남산 숲 속을 서성댔다.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그런 출정의식을 혼자 치르고 난 한 달쯤 뒤부터 몇 년 동안 드문드문 경주를, 남산을 오가기 시작했다.
경주 남산은 바로 경주시내에 닿아 있는 산이다. 주봉은 금오산金鰲山(해발 사백칠십일 미터)이고, 동서가 십이 킬로미터, 남북이 팔 킬로미터인 야산이다. 그런데 이 만만해 보이는 산에 가 보면 뜻밖에도 골짜기는 깊고 능선은 가파르다. 그 많은 골짜기와 능선들에는 신라 천 년 동안 있었던 수를 알 수 없는(어떤 학자는 쉰 몇 곳이었을 것으로, 다른 학자는 백 곳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절터와 여러 탑과, 육십 체體쯤의 석불이 있다. 거기는, 탑들은 쓰러져 있고 불상들은 머리가 떨어져나간 것들이 대부분인 신라 때의 폐허이다. 1987년에 나는 “…신라 천 년 동안 이룩했던 성지聖地가 신라가 망한 이후 지금까지 천 년 동안 폐허화되어 왔다. 폐허가 폐허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이곳 말고는 따로 없다”라고 썼었다. 그곳은 지나간 천 년간보다 최근의 몇 년 동안 더 많이 변했다.
물론 돌부처들은 다 종교적 아이콘이고 신앙의 대상이지만, 나에게는 한국조각의 원형인 미술품이다. 그것들은 저 먼 선사시대의 암각화와 계보를 잇고 있다. 세련된 솜씨를 가진 뛰어난 명장이 새기거나 만든 불상도 있고, 서툰 보통 사람이 그저 정성 하나만 가지고 새기거나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새기거나 만든 시대도, 신라 때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그런 것 중에는 양식화한 부처보다는 보통 사람 얼굴을 새긴 것들도 있다. 여기저기에 있는 ‘승상僧像’들도 보통 얼굴들인데, 아마 스스로를 새긴 자화상일 것이다. 이런 조각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서투나, 지극한 정성을 기울인 표가 많이 나는 것들에서 나는 더 조각의 본질을 느꼈다. 요령이나 경험이 없는 ―경험이 많다 하더라도 서양의 대리석과는 달리 한국의 화강암은 강도가 강해서 정교하게 하기가 아주 어렵다― 보통 사람들이 음각으로(또는 음각과 양각을 섞어서) 서투르게 새긴 것들은 지극한 신앙심이거나, 아니면 표현 욕구였을 것이다. 경험 많은 장인이 했거나 솜씨 없는 보통 사람이 했거나 간에, 천 몇백 년 전 막 새겼을 때보다는 확실히 지금이 더 아름다울 것이다. 천 년 세월의 비와 바람이 화강암의 막 드러나 허옇던 빛깔을 가라앉히고 거칠던 피부를 부드럽게 해서 그렇다.
『경주남산』 책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꽤 유명하다. 그런데, 정작 그 책을 본 사람은 많지가 않다. 고맙게도, 끈질기게도 열화당에서는 포기하지 않고 1987년부터 지금까지도 책방에 깔아 놓고 있다. 그러나 거의 팔리지 않는다. 내 책이지만, ‘안 팔린다고 좋지 않은 책은 아니다’라고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그 책은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수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말하듯이, 낡지도 않았다. 그 『경주남산』(『능으로 가는 길』과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도)을 이제 좀 추려서 전시라는 다른 형태로, 전시 도록이라는 책으로 제시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올 줄 알았다.

해석과 표현

뭔가 새로 일을 시작할 때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마음의 작정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역사가 오래된 유적지를 찍을 때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물론 있는 그대로 찍는 것이지만, 작가의 주관이나 기호가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현재에 있는 과거에서, 어떻게 해서든 보다 과거를 떠올리게 표현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처한 현재의 상황에 주안점을 둘 것인지를 작정해야만 한다. 처음에 경주 남산을 돌아보며 나는 현재의 상태를 찍을 수밖에 없지만, 과거를 은연중에 느끼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다. 그러다 생각이 공기와 빛깔에 미치었다. 천 몇백 년 전의 신라 하늘은 지금보다 더 맑았을 것이고 공기는 지금보다 더 투명했을 것이며 태양은 더 빛났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의 빛깔은 지금보다 더 짙었겠다. 그래서 옛날의 풍부했을 빛깔에 대해서 상상했다. 그리고 짙은 고대의 빛깔이 현실의 폐허를 더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코다크롬Kodachrome 필름이 나타내는 깊이 있는 색감을 떠올렸다. 그 필름은 우리나라 안에서는 구할 수 없었고, 어찌어찌해서 찍었다 하더라도 현상은 외국으로 보내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돌부처들의 “천 년 세월의 비와 바람이… 부드럽게” 한 화강암 피부를 잘 묘사하려면 큰 카메라에 큰 필름을 써야만 했다. 그런데 코다크롬은 큰 필름으로는 생산되지 않았다. 그래서 큰 카메라에는 엑타크롬Ektachrome 필름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될 수 있는 한 빛깔이 진하게 나오도록 하려고 했다. 대상과의 거리와 접근성, 그리고 형태와 질감에 따라서 코다크롬을 넣은 35밀리 카메라, 엑타크롬을 넣은 120카메라와 4×5인치 카메라, 그리고 6×9센티미터 홀더를 부착한 4×5인치 카메라를 썼다. (규격의 단위가 제각각인데, 어찌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진하는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이렇게 쓴다.)
『경주남산』을 편집할 때는 그 책의 판형에 맞춰서, 큰 필름으로 찍은 사진들은 가장자리를 조금씩 크로핑cropping했다. 이번의 「오래된 풍경」 전시와 책에서는 6×6판 두 장을 제외하고는 모든 4×5, 6×9, 6×6을 35밀리 필름처럼 2:3 비율이 되도록 크로핑했다. 2:3 비율이 시각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며 보편적 규격의 책에도 알맞게 편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사진의 편집을, 그것도 혼자서 공부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주간 잡지인 『라이프Life』와 『룩Look』이 전성기일 때였으며, 좋은 기준으로 판단되었으므로 그 두 잡지를, 매 호마다 한 일 년간 분석해 가며 뜯어보았다. 그랬더니 마침내 ‘레이아웃‘과 ’에디토리얼 디자인‘이라는 것의 아리송하던 얼개와 실체가 한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공부는 사진 자체의 실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 즈음 한 미국 사진잡지에서 편집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요컨대, 성화에는 하나님이 가장 크게 그려져 있는 것처럼, 사진 편집도 그렇게 하면 된다”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잡지에 한 꼭지의 포토에세이를 편집할 때, 가장 중요한 사진을 가려내서 그것을 크게 하고 나머지는 들러리를 세우면 된다는 뻔한 말인데, 그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작품집의 편집은 그렇지 않은 수가 많다. 왜냐하면 모든 사진 한 장 한 장이 다 등가인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페이지에 한 장씩 같은 크기로 또박또박 넣는다. 다만 그렇더라도 순서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가치와 느낌이 달라진다.) 이 대목은 경주 남산의 돌부처를 찍을 때 새삼스럽게 상기되었다. 앞의 말에서 하나님을 부처님으로 바꿔도 의미는 같다. 삼존불三尊佛의 경우에 본존불本尊佛은 가운데 가장 크게, 협시불挾侍佛들은 그 양쪽 곁에 작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의미로, 시각으로 레이아웃의 정석을 보여 준다. 그런데 그런 대칭으로 되어 있어 안정감이 있는 삼존불을 찍을 때는 오히려 이리저리 구도를 잡아 보며 망설인다. 이런 경우에, 전시만 할 거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책에 실을 거라면 조금 따져 봐야 한다. 중요한 거라서 두 페이지 가득 실으려면 가운데 본존불이 책의 접히는 한가운데서 양쪽 페이지로 갈라지게 되어 보기에 거북하게 된다. 그래서 중심을 피해 한쪽에 치우치게 본존불이 자리잡도록 하면 반대쪽에는 원치 않는 것들이 따라 들어오게 되면서 안정감 없는 구성이 되는 수가 많다. 그래서 세로 사진으로 찍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 세로 사진은, 그 사진이 중요해서 크게 쓴다 하더라도 한 페이지밖에 할 수 없다. 이 도록에서도 그런 딜레마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와 ‘능’ 또한 내가 상상하는 고대의 짙은 빛깔로 나오도록 찍었다. 모두 다 35밀리 카메라로 찍었으며, 그때는 코다크롬보다 더 풍부한 빛깔을 내는, 새로 나온 필름인 벨비아Velvia를 썼다. 그리고 대개 편광 필터를 써서 빛깔을 더 투명하게 나오도록 했다. 주제에 대한 해석의 결과로서 이런 표현방법이 구사되었다. 표현방법-기교는 주제에 충실히 봉사하는 머슴일 때만 빛이 나야 된다.
전람회는 책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될 수 있는 한 '사진발'이 좋아서 보기 좋게 나온 사진들을 골라서 전시했다. 책의 텍스트와 연관지어서 관람한다면 좋겠지만 그냥 전람회에 제시된 상태로만 관람해도 무방하다.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람회장의 디스플레이에서도 관람하는 사람들과 신경전을 치러야 한다. 사실은 전람회장에서가 책에서보다 더 어렵다.
나는 전람회장에 들어온 관람객을 압도해 보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대신 작은 소리로 선뜻 느낌을 주거나, 조용하게 설득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전람회에 온 사람들을 보다 오래 사진 앞에서 머물게 하려고 온갖 궁리를 다 한다. 빨리 보고, 바쁘게 전람회장에서 나가게 하는 게 서비스가 아니라, 오래 머물며 보고 또 보게 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이 갈등 저 갈등, 그리고 여러 시시콜콜한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걸어놓은 작품 앞을 관람객이 단 몇 초 만에 지나가는 것을 보고 행복해 할 작가는 없다.
‘능’과 ‘삼국유사’와 ‘경주 남산’이 드디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이 각각인 듯싶은 주제의 어떤 부분들은 역사 속에서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오래된 풍경의 이미지들이 서로 어울리며 섞여서 마침내 한 가닥의 서사로 구비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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